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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말산에 방치된 영혼들의 넋을 위로하며 도성을 바라보게 세우다.”

해발 133m의 이말산 정상 비목(碑木)에 이렇게 쓰여져 있다. 은평구 진관동 은평뉴타운 중앙에 위치한 이말산(莉茉山). 이말(莉茉·자스민)이 많이 서식해 생긴 명칭이다. 영혼들은 왜 방치됐고 또한 무슨 이유로 임금이 사는 도성을 향하게 했다는 말인가.
진관동은 한양도성을 보호하기 위한 금장(禁葬·매장금지) 구역의 바로 바깥에 위치하고 무악재와 박석고개(礡 모기지사태 石峴·연신내역과 구파발역 사이 고개)에 의해 격리돼 있어 조선초부터 집단매장지로 애용됐다. 이말산에는 실제 다양한 성씨의 묘역이 산재한다. 2009년 조사에서 유연고 묘지 313기, 무연고 묘지 1433기 등 총 1746기의 분묘가 확인됐다. 그중 내시와 궁녀의 묘가 다수 발견됐다. 내시는 중종·명종대 내시부를 이끌었던 상선(尙膳·종2품) 노윤천, 1501 10등급 년(연산군 7) 사망한 상다(尙茶·정3품) 김경량, 1617년(광해군 9) 사망한 상세(尙洗·정6품) 정여손 등이 묻혀있다. 상선 노윤천은 1546년(명종 1) 을사사화(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윤임 일파의 대윤을 숙청한 사건) 때 왕명을 전달한 공로로 위사원종공신에 녹선된 인물이다.



청약저축 한도 엘리자베스 키스 작 ‘내시’(1919년). [국립민속박물관]



내시는 환관(宦官), 내관(內官), 중관(中官), 중사(中使), 사인(使人), 환자(宦者), 엄관(閹官)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내시제도는 중국 은(殷)나라 갑골문자에도 남아있을 만큼 그역사가 장구하다. 가지급금인정이자계산 우리나라는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 때 환수(宦竪) 관직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난다. 고려 때는 14세기 원나라 간섭기에 고려 출신 환관들이 원나라 조정에 진출해 중국은 물론 고려조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온갖 비리를 일삼았다. <고려사> 열전 권 제35 ‘환자’는 원나라 조정의 고려인 환관으로 고용보(高龍普)와 임바얀퇴귀스 1억대출 10년상환 (任伯顔禿古思·임백안독고사) 등 14명을 소개한다.



가난과 신분 한계 벗어나기 위해 고자 수술하고 내시 자원





상선 노윤천 묘표. 내시 노윤천은 을사사회 때 공을 세워 위사원종공신에 봉해졌다. 노윤천의 묘는 은평구 진관동 이말산에 소재한다. [배한철 기자]





은평구 진관동 이말산의 묘지 흔적. 이말산에는 내시와 궁녀들의 묘지가 집중돼 있다. [배한철 기자]



조선시대 와서 내시제도가 체계화된다. <경국대전> 이전(吏典)은 내시부의 임무와 품계에 관해 명시했다. 내시는 선발시험을 치르고 대궐로 들어온다. 청소나 잔심부름을 하는 견습내시를 거쳐 정식내시가 되면 내시부에 소속돼 대전과 왕비전, 세자궁, 빈궁 등에서 음식물 감독, 왕명출납 및 궁궐 문지기, 궁궐청소 업무를 수행했다. 왕명으로 관원 상가에 조문해 왕 대신 부조하거나 왕릉을 보살피는 일, 왕실직영 잠실에 파견돼 누에를 치는 잠모(蠶母)를 관리하는 일 등도 했다. 내시의 품계는 문무과 체계와 동일하며 최고의 관직은 종2품 상선으로 2명을 뒀다.

내시는 왕을 지근에서 수행하다보니 공신이 된 자가 허다했다. 하음군 전균(1409~1470)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도와 정난공신과 좌익공신 2등, 홍양군 신운은 예종 때 역모로 몰린 남이 장군을 체포해 익대공신 1등에 봉해졌다. 또 중종즉위에 공을 세운 정국공신 4등에 6명, 선조의 피난을 도와 호성공신 3등에 24명의 많은 내시가 책록돼 비판받았다. <선조실록> 1604년(선조 37) 6월 25일 기사는 “호종신 … 가운데 중관(中官·내시)이 24명이며 미천한 복례(僕隷·시중꾼)가 또 20여 명이나 되었으니 외람된 일이 아니겠는가”고 했다.
내시는 가난과 신분의 한계를 벗어나는 방편으로 자발적으로 거세하고 자원하는 사례가 많았다. 대한제국 성립기(1897년·고종 34년) 직전까지만 해도 여의도에 움막으로 된 고자시술소가 영업했던 것으로 구전된다. 내시는 생식기능이 없었지만 어엿이 부인과 자녀를 거느렸다. 아내가 죽으면 재혼했고 첩까지 있었다. 생활고에서 벗어나고 왕실과 줄을 대기 위해 평민 뿐 아니라 양반가문 규수들도 서로 내시의 아내가 되고자 했다. <연산군일기> 1496년(연산 2) 2월 2일 기사는 “궁궐의 일은 내시가 관장하고 있는데 이 무리들이 사족의 딸들을 데려다가 아내로 삼아 서로 통하게 되어 궁중의 비밀을 누설한다”고 했다.


내시들 사내구실 못해도 부인에 첩까지 두고 양자도 4~5명 입양
내시 부인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많은 전토와 노비, 금은보화를 소유하며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생활했다. 남편의 품계에 따라 1품 정경부인(貞敬夫人), 2품 정부인(貞夫人) 등 높은 봉작도 받았다. 그러나 남편이 사내구실을 못하는 것에 불만도 없지는 않았을 터. 실록에는 드물지만 내시부인 간통사건도 등장한다.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도 “환자는 그것(생식기)이 흉하고 누추하여 실로 인류가 아니지만 장가들고 가정을 가져서 보통사람처럼 산다. 혹여 그 아내되는 사람이 다른 접촉이 있을 때는 유부녀의 실행(失行·간통)으로 죄를 주니 어찌 천리와 인정이라 할 것인가”라고 했다.

내시는 생식능력이 없으니 양자로 대를 이었다. <명종실록> 1566년(명종 21) 8월 3일 기사는 “환자는 반드시 어린 환자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으며 많은 경우 4~5명에 이른다”고 했다. 특이하게도 내시집에 들어가서도 양부의 성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친가 성을 그대로 유지했다. 따라서 입양된 형제간에도 성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내시들은 어디에 살았을까. 내시 주거지로는 △종로구 효자동, 봉익동, 운니동, 계동 △서대문구 연희동, 가좌동 △은평구 신사동, 응암동, 진관동, 중흥동(고양 북한동) △중랑구 묵동 △고양 덕양구 용두동 △파주 당하동 △양주 장흥면 일영리, 광적면 효촌리 △구리 교문동 △남양주 화도읍 마석우리, 평내동, 차산리 △안양 동안구 관양동 △용인 삼가동 등이 있다. 효자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내시 집단거주지였다. 처음에는 내시의 별칭인 화자(火者)들이 살던 동네라고 해서 ‘화자동’으로 불렸다가 음이 변해 효자동이 됐다고 전한다. 조선전기 내시들의 관아인 내시부가 영추문 밖 경복궁 서쪽에 위치해 부근에 많은 내시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내시부 주변에 주로 살았고 퇴직 후에는 은평구 등지에 집단 거주





김새신 초상(1604년). 김새신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 3등에 봉해졌다. [파주 93뮤지엄]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아래 운니동과 봉익동에도 내시들이 다수 살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내시부가) 창덕궁 선정문(宣政門) 안 동쪽에도 있었다”고 했다. 조선중기 이후 창덕궁이 법궁으로 사용되면서 편전(왕의 집무 건물)인 선정전 옆에 내시부가 설치됐고 그 주변에 내시들이 거주했던 것이다. 한때 국가 바둑대회가 열렸던 운니동 운당여관(1994년 양수리 종합촬영소 이전) 역시 구한말 내시가 살던 집이었다.

내시들의 묘지는 서울 은평구 진관동, 도봉구 쌍문동, 노원구 월계동, 중랑구 신내동과 고양, 양주, 남양주, 파주, 안양, 안산 등지에 분포한다. 이말산과 함께 은평구 진관동 백화사 동 편 북한산 자락에도 내시묘(북한산 내시묘역)가 존재했다. 중골마을로 불렸던 북한산 묘역에는 이사문(李似文)을 파조로 하는 이사문공파 문중 분묘 45기가 분포했다. 비석과 상석에 관직이 기록된 인물은 총 14명으로 종2품 상선은 임성익, 박민채, 김성휘, 박황, 오준겸 등 5명이다. 그러나 2012년 묘역이 매각되면서 모두 훼손됐다. 노원구 월계동 초안산 자락의 청백아파트 주변에도 50여개의 내시 묘가 있었지만 1990년대 택지가 개발되고 청백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화장되거나 이장됐다.
하음군 전균의 묘는 중랑구 신내동에 있으며 현존하는 내시묘 중 가장 오래됐다. 그는 내시로서는 유일하게 실록에 졸기를 남겼다. <성종실록> 1470년(성종 1) 3월 6일의 전균 졸기는 “환관으로서 공신이 되고 작위가 1품에 이른 것은 그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해 호성공신 3등에 봉해진 낙성군 김새신(1555~1633)의 묘는 은평구 신사동 덕산중 서편에 소재하며 공신책봉 때 제작된 초상화(파주 93뮤지엄 소장)가 남아있다.


내시들 국왕 지근에서 수행하며 벼슬 1품까지 승진, 공신도 허다
궁녀는 내명부 소속으로 내시와 마찬가지로 궁궐에서 왕과 왕비를 모시는 집단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내명부 품계 중 궁녀의 최고 직위는 내시보다 낮은 정5품 상궁(尙宮), 상의(尙儀)다. 궁녀들은 각 처소에 배치돼 왕실 의식주를 책임져야 해서 내시보다 숫자가 많았다.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은 “우리 조정에는 환관이 335명, 궁녀가 684명으로 이들이 받는 녹을 합쳐서 따지면 쌀이 1만1430석이나 된다”고 했다. 연산군 시기는 궁녀가 1000명에 달했다. <연산군일기> 1506년(연산군 12) 7월 18일 기사는 “왕이 금표(禁標) 안 길을 따라 두모포(豆毛浦·옥수동)에 놀이 가므로 궁녀 1000여 명이 따랐었는데 왕이 길가에서 간음하였다”고 했다.

궁녀들은 가난과 사주팔자 등 특별한 사연에 의해 궁궐로 들어오지만 선발조건은 까다로워 선조 중 중병을 앓거나 죄지은 자가 없어야 했다. 10세 전후에 입궁하며 15년이 경과하면 관례(冠禮)를 치르고 정식나인(시녀)이 되며 다시 15년이 지나야 여관 최고직인 상궁에 오를 수 있었다. 왕의 승은을 입으면 20대에도 상궁이 됐고 이 경우 승은상궁으로 호칭했다. 승은상궁들이 왕의 자식을 낳게 되면 종4품 숙원(淑媛) 이상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내시들은 궁궐밖에 가정이라도 있지만 궁녀들은 구중궁궐에서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불미한 일도 적지 않았다. <정조실록> 1776년(정조즉위년) 12월 9일 기사에서 정조는 “여름 사이 중관(내시)이 이른바 방자나인(房子內人·궁녀의 종)이라는 것들과 은밀히 통간한 것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며 “죄상을 밝혀 율대로 처분하라”고 명했다.
궁녀들은 나이가 많거나 병에 걸려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 출궁했다. 은평구 수국사(구산동 314) 부근에 ‘궁말’이 있었고 이곳에 조선말까지 궁궐에서 물러나온 궁녀들이 20~30가구 거주했다고 한다. 간혹 기상이변이 있을 때도 결혼하지 못한 여인의 한이 하늘에 닿았다고 인식해 궁녀를 방출했다. 숙종 11년(1685) 2월 29일 한재로 궁녀 25인을 출궁시켰고, 영조 26년(1750) 9월 5일은 비가 너무 내려 45명을 뽑아 내보냈다.


궁궐 의식주 총괄했던 궁녀 숫자는 내시의 2배 이상···사후 친정 선산에 매장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와 궁녀들. 순헌황귀비 엄씨(앞줄 좌측 첫번째)와 의친왕비(앞줄 중앙) 뒤로 궁녀 3명이 서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고종의 후궁 귀인 양씨. 귀인 양씨는 상궁이었지만 고종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됐다. 덕혜옹주의 생모다. [국립고궁박물관]



퇴직한 궁녀들은 죽어 주로 친정 선영에 묻혔다. 이말산의 옥구 임씨 임상궁 묘와 임실 이씨 이상궁 묘, 은평노인복지관 뒷산의 상궁 김해 김씨 묘, 노원구 월계동 초안산의 상궁 밀양 박씨 묘, 고양시 정발산에 있었던 상궁 안동 김씨 묘 등은 모두 아버지와 선조 묘가 있는 선산에 자리잡았다. 이중 임상궁(1635~1709) 묘터는 이말산 자락의 은평구 진관동 산 86에 있다. 그녀는 숙종의 여동생 명안공주(1665~1687)의 보모상궁(왕자·왕녀 양육을 맡은 나인의 총책임자)을 했고 공주는 임상궁을 이모로 대했다. 비문에 의하면, 상궁 임씨는 1635년(인조 13)에 출생해 13세(1647)에 입궁했다. 명안공주가 23세로 죽자 동생을 그리워하던 숙종은 임상궁을 공주집에 살게 하며 제사 지내게 했다. 1709년(숙종 35) 임상궁이 75세에 사망하자 임금은 장례품을 내려 애도했다.

궁녀 출신 중 가장 출세한 인물은 장희빈(본명 장옥정·1659~1701)이다. 희빈 장씨는 1659년(효종 10) 8월 9일 불광리계(불광근린공원 서편 관동마을)에서 역관 장경의 1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장희빈은 11세에 아버지를 잃자 당숙 집으로 옮겨 살다가 입궁했고 숙종의 눈에 띄면서 경종을 낳고 정1품 희빈이 된다. 경종이 세자로 책봉되고 인현왕후 민씨가 폐출되자 왕비 자리에 오르지만 5년만에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다시 희빈으로 강등됐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 사후 궁궐에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으로 드러나자 끝내 사약을 받고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애초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문형리에 묻혔다가 1969년 남편 무덤이 있는 서오릉으로 이장됐다.
내시와 궁녀들의 신분은 중인 이하 하층민들이었다. 엄격한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바꿨던 그들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았을까.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경국대전. 연려실기술(이긍익). 신증동국여지승람. 성호사실(이익)
2. 은평의 내시·궁녀. 박상진. 은평향토사료집 19. 은평문화원. 2021
3. 은평발굴 그 특별한 이야기. 서울역사박물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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