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울산시민 여러분, 제가 울산사람이다. 우리 가족들이 살길을 찾아서 1974년 6월 30일 전부 울산으로 왔다. 복산동에서 달셋방 얻어서 살았다. 그러니까 40년 더 됐다. 그 당시에 울산에 왜 오게 되었는가. 우리가 합천에서 살다가 뒷집 사람이 자기 집에 불을 질렀다. 그런데 자기 집은 안 타고 불길이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집이 홀랑 타버렸다. 그 촌에서 오두막 짓고 살다가 집이 없어져버렸다. 그래서 아버지가 울산에 이모가 있으니까 울산가면 먹고 살길이 생긴다. 그래서 전 재산 팔아보니 74년도 6월 30일 기준으로 32만원이었다. 32만원으로 전 가족이 복산동으로 왔다. 저는 고학하며 대학을 다닐 때다. 그래서 울산 복산동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복산동이 산비탈 중간에 있었다. 그래서 집이 달셋방을 살았는데 겨울에 연탄을 못 땐다. 구들이 깨져서 연탄가스가 새어 나오기 때문에 한 겨울에도 그 당시 제 기억으로는 굉장히 추웠는데 이불만 덮고 살았다. 저희 아버지는 아시는 분들은 많이 아실 것이다. 울산에 현대조선소에 경비원을 했다. 그때 경비원은 지금 경비원과 또 다르다. 그때는 현대조선소가 담이 없을 때다. 그냥 전하동 바닷가에 철조망 쳐놓고 배지을 초창기 때였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배에서 나오는 철판과 철근 조각들을 그것을 훔쳐간다고 회사에서 백사장에 동그란 의자 하나 주고 비바람 가림막 하나 없이 그냥 전하동 모래사장에서 밤을 꼬박 지새운 것이 임시직 경비원이었다. 제가 듣기로 일당 800원 받았다. 우리 가족들이 울산에 와서 여동생과 누나는 공장에 다녔다. 그럭저럭 먹고 살았다. 그런데 제 기억으로 그때 모닥불 피워도 가림막 하나 없으니 겨울에는 워낙 추워서 회사에서 막소주를 줬다. 댓병짜리 막소주를 줘서 밤새 소주 먹으면 추위 견디게 했다. 그러다 보니까 저희 아버지가 이듬해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40년이 더 되었다. 저희 어머니는 울산 우정동 쪽에 조그만한 방 칸 얻어서 여동생과 누나 아들, 딸들 키워주느라고 거기 계셨고 저는 전국을 떠돌며 검사를 하고 있었다. 지금도 짠 한 것이 어느 날 동사무소에서 구호물자 나오는데 검사아들 있다고 하면 구호물자 안줄까 싶어서 돌아가실 때까지 ‘내 아들 검사’라고 한 마디 안하셨다. 그 당시 검사하면서 기껏 우리 어머니에게 드린 돈은 제 기억으로 15만원이다. 저도 검사하면서 그 당시 검사할 때는 지금 검사와 달라서 검사들이 자기 월급 절반을 내놓아야 한다. 수사관들 밥 먹이고 용돈 주고 또 피의자들 잡아와서 밤새도록 수사하면 나만 밥 먹고 피의자는 밥 안 줄 수 없으니까, 그 당시 곰탕이 1,300원으로 기억하는데 곰탕을 먹고 싶어도 사람을 여럿이 잡아 오니까 그 돈이 비싸 800원짜리 백반 사다놓고 같이 먹고 아니면 라면 끓여서 같이 먹고 ‘어차피 내일 징역 들어가는 라면먹고 들어가나 곰탕먹고 들어가나 똑같다’라고 하던 시절이다. 그러니까 저도 검사 하지만 돈이 없다. 그래서 참 힘든 세월을 보냈다.
저희 어머니는 이제 까막눈이다. 글을 모른다. 저희 아버지는 아예 학교를 가보지 않았으니까 무학이다. 아버지는 글을 안다. 하지만 어머니는 까막눈이다. 글을 몰라서 밖에 나가면 손바닥에 버스 번호를 적어드린다. ‘올 때 엄마 버스번호 이거 보고 타시라.’ 제가 나이가 60이 갓 넘었다. 제가 평생 살면서 정치하는 사람들 가장 존경하는 인물 말하라고 하면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쭉 이야기 하다보니까 다산 정약용도 나오고 그러더라 그런데 저는 내 인생의 멘토는 내 엄마다. 요즘 젊은 사람들 부모 잘못 만났다고 한탄하고 또 부모님한테 항의하고 하는 것 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세상에 낳아준 것만 해도 얼마나 큰 은혜인가. 저는 어머니 모시고 살면서 제대로 못해드렸지만 제 인생의 멘토는 내 엄마다.
‘제가 서민 대통령이 되겠다’고 이렇게 써놨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서민들은 꿈이 단순하다. 첫째, 내 자식이 잘 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어렵게 살고 핍박을 받고 또 짓눌림을 당하고, 힘없어서 눌려 살고 하더라도 내 자식만큼은 건강하고 그리고 떳떳하고, 돈 좀 벌고 큰 소리 치고 부자로 한 번 살게 해줬으면 좋겠다. 저는 서민들의 첫째 꿈이 내 자식 잘되는 것이, 그것이 첫째 꿈이라고 본다. 둘째가 내 집 갖기다. 저는 7살 때, 리어카를 끌고 아버지 뒤따라서 고향을 떠난 이후에 집을 가져본 게 제 기억으로는 40세가 다 되어 가지고 검사하면서 은행에 대출받아 주공아파트 하나 가져본 것이다. 그 아파트를 처음 가진 날 잠을 못 잤다. 제가 그때 38살인가 39살 때인가 그랬는데 주공아파트 하나 집사람이랑 절약해서 하나 샀을 때 그날 밤에 집에 들어갔을 때 잠을 못 잤다. 집을 가져 본 것이 몇 년 만인가 했다. 한 32~3년 만에 내 집을 가져본다. 그래서 이 땅의 서민들도 첫째가 내 자식 잘되기, 둘째가 오두막살이라도 좋다. 조그마한 내 집을 하나 가져보는 것이 서민들의 꿈이라고 본다. 그래서 홍준표가 대통령이 되면 서민들의 꿈을 한 번 이룰 수 있도록 그렇게 해주는 대통령이 한번 되어봤으면 좋겠다.
오늘 울산시민들께 와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제가 고향이 참 많다. 경남 창녕 남지에서 태어나서 남지초등학교 1학년 다니고, 대구신천초등학교 2학년, 대구신암초등학교 3학년, 창녕읍으로 내려와서 창녕초등학교 4학년, 그 다음에 합천 산골로 쫓겨가서 합천 덕곡 율지 거기에서 학남초등학교, 그것은 분교다. 우리 졸업생이 그 당시에 37명 밖에 안 되었다. 거기에서 5학년, 6학년을 마치고 또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그리고 대학 혼자 들어가서 울산으로 이사를 와서 울산에서 우리 가족들 거주한 게 40년이 넘으니까 울산도 고향이 되어버렸다.
우리 울산분들은 제가 알기로는 처음에 10만명이 안 되는 동네였다. 그런데 공업단지가 되고, 전국에서 다 몰려들었다. 그래서 지금 울산사람들이 다 되어버렸다. 그래서 15대 최형우 국회의원 계실 때, 언제나 무엇이라 했느냐 하면 울산후배, 울산후배 이러시며 제게 용돈도 많이 주셨는데 요즘은 뇌일혈로 쓰러지셔서 힘들어 하시는데 그래서 울산을 찾아와서는 여기가 홍준표의 마지막 고향이라는 생각을 한다. 오늘은 정치연설보다도 내 고향에 와서 고향사람들에게 이 말만 하고 가겠다. 지금 또 부산으로 가야한다.
5월 9일에 조선소 일당 800원을 받던 경비원의 아들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 또 까막눈인 엄마의 아들도 바르게 살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 여기 와서 내 고향 분들에게 정치연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정말 제가 처음에는 굉장히 어려웠다. 2, 3일 전부터 대한민국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그래서 2, 3일 전부터 이제 치고 올라가기 시작해서 이제는 같이 붙었다. 그 언론에서 나오는 여론조사 전부 엉터리니까 안 믿어도 된다. 여러분, 이 중에서 여론조사 받아 본 사람이 있나. 없다. 자기들끼리 장난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체조사를 하는 것이 있다. 그것도 조사결과를 발표하면 선관위에서 가만히 안 있을 것이고, 또 고발한다고 하니 그 이야기는 못하지만 하여튼 이틀 전부터 이제는 붙었다. 두 사람이 붙었다. 우리 고향 분들만 5월 9일에 전부 투표소로 가서 경비원 아들 한 번 찍어주면 경비원 아들도 대통령 될 수 있어야하지 않겠나. 그렇지 않는 가. 요즘 전국의 경비원분들이 지금 소문이 나니까 전국 경비원분들이 힘이 나서 난리라고 한다. 지금 우리 표 안 나오는 전라도에서도 우리 사무실로 전화 엄청나게 많이 온다. 이번 대통령선거는 경비원 아들 찍어야겠다고 실제로 그런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제 고향 분들을 믿고 간다. 믿고 가는데 언론에서는 이제 우리 기사를 안 다뤄준다. 그러니까 오늘 오신 분들이 SNS를 통해서 전부 퍼 나르고 옆집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해서 가족모두 가서 우리 5월 9일에 40년 전에 울산에 이사 와서 울산 사람인 홍준표 그리고 말단 경비원의 아들, 이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그것은 어떻게 보면 서민들의 꿈이다. 하여튼 제가 잘하겠다. 그리고 대통령 시켜주면 제가 5년 동안 대한민국 서민을 위해서 정말 잘 하겠다. 고향 어르신들하고 선후배들도 있고 하는데 이제 저는 부산으로 가야한다. 고맙다.
2017. 4. 29.
자유한국당 공보실